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통을 일컬어 “속죄의 엄청난 무게”라고 표현했다.
“이 세상과 다른 여러 세상의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놀라셨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아셨으나 경험했기 때문에 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격심하고 가혹한 속죄 과정을 겪어보기 전에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고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그분의 특별한 지성으로 상상한 그 이상으로 훨씬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하늘의 사자가 나타나 힘을 북돋아 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누가복음 22:43 참조)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축적된 죄의 무게가 완전하고, 죄 없고, 감수성이 강한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병고도 또한 속죄의 엄청난 무게 중 하나였습니다.(앨마서 7:11~12; 이사야 53:3~5; 마태복음 8:17 참조) 고통을 받은 예수님은 아버지께 그 시간과 그 잔이 자신에게서 물러가기를 간청한 것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적절한 인용으로 간청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가복음 14:35~36)
여호와이신 예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세기 18:14)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의 천사는 또한 당황해 하는 마리아에게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누가복음 1:37; 또한 마태복음 19:28; 마가복음 10:27; 누가복음 18:27 참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요청은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이 고통의 극치에서 그분은 혹시 수풀에 걸린 수양을 바라기라도 하셨겠습니까?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분의 고통, 무한대로 늘어난 그 어마어마한 고통으로 그분은 이후에 십자가에서 영혼의 울부짖음을 토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버림 받았기에 터져나온 울부짖음이었습니다.(마태복음 27:46 참조)
그런 중에도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보인 숭고한 순종심을 그대로 간직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성도의 벗, 1985년 7월호, 78~79쪽)
한 경전 학자는 구주께서 겪으신 고통은 타락이 낳은 결과를 모두 짊어지는 무게였다고 설명했다. “예수께서는 가장 쓰라린 굴욕을 견뎌내야 할 시간이 다가왔으며 그때로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에 터져나온 그 위대한 외침에 이르기까지 지상에서 그분께 남은 것이라고는 육신에 가해지는 끔찍한 고문과 통렬한 정신적 고통뿐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온갖 고통이 움츠러드는 그분의 몸에 산처럼 쌓여야 했습니다. 그분의 영혼은 잔인하고 참담한 모욕이 안겨주는 비참한 고통으로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그리고 이 육신의 고문과 영혼의 고통 속에서 그분의 신성한 영이 발하던 고귀하고도 청명한 빛은 짧지만 끔찍한 암흑을 겪어야 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아픔과 가장 무자비한 치욕, 그리고 모든 죄의 짐과 배도하고 타락한 인간 존재에 대한 풀리지 않는 문제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이 모든 무게를 바로 그때 그분께서 견뎌야 하셨습니다.”(F. W. Farrar, The Life of Christ [London: Cassell and Co., 1874], pages 622~23; Bruce R. McConkie, The Mortal Messiah, Book 4 [1981], 126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