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불의를 선택하는 민족에게는 멸망이 닥쳐올 것이기에,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행동론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한때 소수의 목소리였던 것이 다수의 목소리가 되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과 어리석은 이기심의 결과가 뒤따르게 됩니다.(모사이야서 29:26~27 참조)
사회의 단일 이해 집단들이 한때 널리 공유되던 보편적 가치에 냉담해질 때 더욱 빠른 속도로 문화가 쇠퇴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사람들의 무관심이나 묵인으로 촉진되고, 그렇게 사회는 조심스럽게 지옥으로 이끌려 갑니다.(니파이후서 28:21 참조) 하지만 이 흐름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 흐름에 동조하도록 강요받을지도 모르나, 본질적으로 저항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
실제로 우리에게는 사회의 실상을 보여 주는 표적을 인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
문화적 퇴보에 따른 책임은 실제로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 모두에게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악한 지도자들을 비난하기란 쉬운 일이지만, 그 추종자들의 책임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종자들은 퇴보를 합리화하며 자신은 그저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지도자는 추종자들에게 지시만 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와 추종자의 개인 성품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추종자에게 훨씬 많은 것들이 요구됩니다.”(리아호나, 1999년 7월호, 27~28쪽)
보이드 케이 패커 장로도 관용을 왜곡해서 적용하는 최근 추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관용이라는 덕목은 왜곡되어 도덕성과 대등하거나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며 위세를 떨칩니다. 관용을 베푸는 것, 즉 누군가의 행동을 용서하는 일은 그와 다른 것입니다. 가족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기까지 하는 비도덕적 행위를 사회적으로 합법화하여 법률로 보호하는 일은 관용이 아닙니다.
관용을 과장된 의미로 이해하면 가족을 위협하고 다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을 저지른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위험한 덫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 모사이야가 [모사이야서 29장 26~27절에서] 묘사한 상태에 위험할 정도로 근접해 가고 있습니다.”(“Children of God,” BYU Women’s Conference, May 5, 200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