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마는 충실한 앰몬아이하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신권 권능과 신앙으로 끔찍한 죽음에서 구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앨마서 14:11 참조) 앨마는 엠율레크에게 주님께서는 의로운 순교자들을 박해자의 사악한 행위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설명했다.(앨마서 14:11; 60:13 참조)
칠십인에서 봉사하던 시절에 로날드 이 폴맨 장로는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선택의지를 불의하게 행사하여 의로운 이들이 고통 당하는 일을 허용하신다고 확언했다. “순종심 있고 충실한 사람들이 삶에서 겪는 역경은 질병, 사고, 무지 혹은 대적의 영향력으로부터 올 수 있습니다. 선택의지를 유지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이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사악한 행위의 결과로 고통을 받는 일을 허락하십니다.(니파이전서 18:16 참조)”(성도의 벗, 1989년 7월호, 27쪽)
분명히 우리는 간악한 사람들의 손에 고통을 당한 의로운 이들의 죽음을 슬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의 세계에서 그들이 받을 보상(앨마서 40:12 참조)과 해의 왕국에서 받을 그들의 최종 상태(교성 76:50~70 참조)를 알고 기뻐한다. 교리와 성약 42편 46절에는 이렇게 나온다. “내 안에서 죽는 자들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니, 이는 죽음이 그들에게 달 것임이니라” 이것은 의로운 이들의 죽음에 고통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받을 영원한 보상이 아주 커서 상대적으로 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뜻이다.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 친구와 친척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릴 만큼 제가 약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볼 때 눈물을 흘립니다. 제 영혼은 인간의 자녀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낍니다. 그들이 울 때 저도 함께 울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뻐할 때 저도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죽음이 있다고 하여 애도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습니다. ……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은 후기 성도들에게서 거두어졌습니다. 그들은 현세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범법하여 죽음이 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덕분에 삶이 오며, 그래서 죽음이 찾아와도 이후에 다시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조차도 기뻐합니다. 다시 일어나고, 무덤 너머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Conference Report, Oct. 1899, 70)
의롭고 무죄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때, 어떤 이들은 비판적인 사람이 되거나 신앙을 잃는다.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은 우리가 고통을 목격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권고를 주었다.
“만약 우리가 현실에 주어진 것만으로 영생을 바라본다면 고통, 슬픔, 실패와 단명은 엄청난 재난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전세에서 내세까지 멀리 뻗어 있는 영원한 것으로 본다면 일어나는 모든 일이 지당하다고 인식될 것입니다.
우리가 딛고 일어설 시련, 성취할 책임, 우리 근육을 단련시킬 일, 우리 영혼을 시험할 슬픔을 주시는 것에 그분의 지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힘을 시험할 유혹, 인내를 배울 수 있는 질병, 불멸과 영광을 얻게 될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아픈 사람들이 모두 다 낫는다면, 의로운 사람들이 모두 보호받고 간악한 이들이 모두 멸망한다면, 아버지의 전체 계획은 무효가 되고 복음의 기본 원리인 선택의지는 끝나버릴 것입니다. 아무도 신앙으로 살아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기쁨과 화평과 보상이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즉시 주어진다면 악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선을 행하겠지만 선행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힘을 시험하고, 성품이 발전하고, 권능이 커지며, 선택의지가 없어지고, 오로지 사탄의 통제만 있을 것입니다.
모든 기도가 우리의 이기적인 소망과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대로 즉시 응답된다면 고통, 슬픔, 실망, 심지어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기쁨, 성공, 부활 또한 없을 것이며 영생과 신성도 없을 것입니다.”(Faith Precedes the Miracle [1973],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