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시련이 항상 역경의 형태로 오는 것은 아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때때로 “신앙[의] 시련”은 단순히 우리 신앙을 행사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가르쳤다. “여러분은 모로나이가 가르친 이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신앙을 더욱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비록 보이지 아니하나 바라는 것임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이를 논박하지 말지니, 너희의 신앙이 시련을 겪기까지는 너희가 증거를 받지 못함이니라.’[이더서 12:6; 기울임체 첨가] 이에 따라 여러분이 자신의 신앙을 시험할 때마다, 다시 말해 영의 영향을 받기에 합당하게 행동할 때마다 영으로부터 확인하는 증거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을 받을 때 여러분의 신앙은 강해집니다. 그런 일이 반복될 때 여러분의 신앙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리아호나, 2003년 5월호, 76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단계의 신앙과 그 전제 조건들을 서술했다.
“예비하는 신앙은 알려진 과거 경험으로 형성되며, 이것은 믿음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미래 경험을 위해 속죄를 이루는 신앙을 행사해야 하며, 이것은 기적이 일어나는 기회가 된다. 엄격한 신앙, 산을 움직이는 신앙, 야렛의 형제와 같은 신앙은 기적과 지식에 선행한다. 야렛의 형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믿어야 했다. 그는 그 행위를 완성하는 능력이 명확해지기 전에 행동해야 했다. 그는 온전한 경험이 실현되는 초기 단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 경험을 행해야 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가깝고 먼 장래에 요구하실 조건들을 무조건, 그리고 미리 동의하는 것이다.”(Christ and the New Covenant [1997], 18~19)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신앙이 “시련을 겪[은 후]”에 증거를 받는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 사는 한 자매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분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 생활과 학업을 병행했습니다. 그분이 직접 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다닌 대학교에는 등록금이 밀린 학생들은 시험을 치를 수 없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월급을 받으면 먼저 십일조와 헌금을 따로 떼 놓은 뒤 나머지를 등록금과 기타 비용으로 분배했습니다.
한번은 심각한 재정난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목요일이 월급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그 달에 부담해야 할 비용을 계산해보니 십일조와 등록금 둘 다를 낼 수는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했습니다. 격월로 실시되는 시험이 바로 그 다음 주에 시작되는데, 만일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그 학기는 놓칠 수도 있었습니다. 많이 고민했습니다. …… 마음이 아팠습니다. 결정을 해야 하는 고통스런 순간이 다가오는데,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십일조를 내느냐 아니면 학교에서 인정받는 데 필요한 학점을 딸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고민 때문에 기진맥진해졌으며 토요일까지 그런 상황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침례 받을 때 십일조 법에 따라 생활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선교사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의무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번민이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으로 즐겁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
그날 저녁에 기도를 드리면서 저는 주님께 제 우유부단함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는 일요일에 성찬식 시작 전에 감독님을 뵙고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와 헌금을 바쳤습니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제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행복하고 평안을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날, 출근을 한 후 수요일에 시작되는 시험을 치를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도무지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
근무 시간이 끝날 무렵, 사장님이 오시더니 그날 마지막 일을 주셨습니다. 그런 뒤 그분은 가방을 들고 작별 인사를 하셨습니다. …… 그런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저를 보고 물어 보셨습니다. “대학교는 잘 다니죠?” 저는 깜짝 놀라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 것이 “네 그럼요!” 한 마디였습니다. 그분은 저를 찬찬히 보시더니 다시 작별 인사를 하셨습니다. ……
느닷없이 비서가 방에 들어와서 제가 정말 운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장님께서 오늘부터 언니의 대학 등록금과 책값 전액을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겠다고 하셨어요. 퇴근 전에 제 자리에 오셔서 내일 언니한테 얼마를 지급해야 할지 알려 주세요.”
비서가 나간 뒤에 저는 겸손한 마음으로 펑펑 울면서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아 주님의 사랑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 그렇게 많은 축복을 주실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달치 등록금만 내면 되는데 제가 받는 금액과 비교하면 제가 일요일에 바친 십일조는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기도하는 동안 말라기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 3:10) 그 순간까지 저는 그 경전에 들어 있는 약속의 위대함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이 계명이 참으로 하나님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지상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사랑의 증거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리아호나, 2002년 7월호, 81~82쪽)